혈액순환이 안 되면 각종 질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시장에 돈이 돌지 않으면 시장도 병에 걸린다. 시장에서 돈을 구하기 힘들어지면 금리 폭등이라는 무서운 `돈맥경화`가 발생한다. 돈을 빌리는 값이 그만큼 높아지고 가계나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금융비용이 커진다. 금융시장이 붕괴되면 실물경제도 버티기 힘들다. 결국 경제는 공황 상태로 내몰리게 된다.
`돈맥경화` 현상을 방지해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을 하려면 시장에 돈이 돌아야 한다.
이를 위해선 일단 유동성, 즉 통화량(M)이 풍부해야 한다. 그러나 통화량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시장에 공급된 유동성이 필요한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화폐 유통이 잘돼야 한다. 피가 많다고 건강한 것이 아니라 혈액순환이 잘돼 피가 몸 구석구석을 잘 돌아야 건강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혈액순환이 얼마나 빠르게 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바로 화폐유통속도(V)다.
화폐유통속도는 어떤 상품ㆍ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화폐가 몇 번 쓰였는지 보여준다. 1년간 화폐유통속도를 보려면 1년간 창출한 재화ㆍ서비스 부가가치에 가격(물가ㆍP)을 곱해 산출한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당해연도 통화량(광의의 통화ㆍM2)평균으로 나누면 된다(V=GDP/M).
화폐수량설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통화론자들은 화폐유통속도를 거의 고정적인 것으로 봤다. 한 경제 내에서 지불 습관 등 화폐 선호 관행이 좀처럼 잘 바뀌지 않는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국내 총생산량도 단기간에 크게 변동되기 어렵다는 점에 근거해 통화량을 늘리면 물가가 상승하고 줄이면 물가가 하락한다고 보고 통화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 전 세계 화폐유통속도를 살펴보면 이 같은 전제가 들어맞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화폐유통속도가 대세 하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나라를 보자. 1980년대 화폐유통속도는 2를 넘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들어 1 수준으로 떨어지더니 외환위기 때인 1998년에는 0.840로 주저앉았다. 지난해 0.715선으로 떨어진 속도가 올해 상반기 0.72 수준으로 소폭 회복됐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화폐유통속도 하락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미국과 유로권 등 주요국 화폐유통속도도 최근 10년간 큰 폭으로 떨어졌다. 윤상규 한은 통화금융팀 차장은 "전 세계 주요국 화폐유통속도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 하나의 트렌드다. 다만 미국 화폐유통속도 절대치가 한국보다 높게 나타난 것은 통화량 지표가 다르기 때문"이라며 "한국은 예금은행 중심이지만 미국은 직접금융을 많이 하는 투자은행 중심이다. 그런데 투자은행 신용공여액이 통화량에 잡히지 않아 절대 수치가 높게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폐유통속도가 떨어진 것은 각국 정부가 통화량을 지속적으로 늘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1990년에 매년 20%대 통화량 증가율을 보였고 1997~1998년 IMF외환위기,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두 자릿수로 통화량을 늘렸다. 지난해와 올해 들어 통화증가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절대 통화량 총량이 늘면서 화폐유통속도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민성기 한은 금융시장국장은 자본시장 발달에 따른 `금융 중층화`를 지목했다. 민 국장은 "과거에는 은행 예금이 M2에서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이제는 자산운용사 펀드 등 자금이 다시 은행에 재예치되는 등 다양한 금융상품 출현으로 금융 중층화가 진행돼 이것이 통화량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민 국장은 "과거 통화량 목표 정책을 운용할 때는 매번 화폐유통속도를 예측해 얼마만큼 통화를 풀어야 인플레이션이 없는 적정 성장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지만 금리 목표 정책 운용으로 바뀐 1999년 이후에는 본원통화 조절만으로는 통화량을 원하는 대로 조절하기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저금리 추세도 화폐유통속도 하락을 가져오고 있다. 금리가 낮으면 통화 보유 비용이 떨어지고 동일한 소득이더라도 통화 잔량이 늘어나 화폐유통속도가 떨어진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글로벌 금리는 역사상 최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글로벌 화폐유통속도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급격한 하락세에 접어든 것은 엄청나게 풀린 유동성이 생산적인 부문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현재 한국은 물론 유로 지역과 영국 일본 중국 모두 통화유통속도가 1 미만이다. 미국 화폐유통속도가 1.656인데 10년 전만 해도 2에 가까웠던 점을 감안하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통화팽창 정책효과가 반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최근 주요국 화폐유통속도 감소는 경기 둔화 신호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진단이다.
배선영 수출입은행 감사는 "통화량이 중요한 게 아니다. 출구전략을 서둘러야 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저금리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가계대출이 급증하는 등 통화량 질이 나빠졌다"며 "통화량 증가가 GDP 개선에 기여하지 못하다 보니 화폐유통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박봉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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